"국민 영웅인 줄 알았는데"…그런 그를 그린 남자의 최후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입력 2023-07-08 07:00   수정 2023-07-08 11:07


“어떻게 그런 식으로 투표를 할 수가 있어? 당신한테 생각이라는 게 있기는 해?”(아내)
“내가 투표까지 당신 시키는 대로 해야 해? 우리나라 미래를 생각하면 이럴 수밖에 없었다고!”(남편)
“나는 당신 같은 사람이랑은 도저히 못 살아. 우리 이혼해. 이혼하자고!”(아내)

아무리 그래도 “이혼하자”는 말은 홧김에 뱉은 말인 줄 알았는데…. 며칠 뒤 아내는 이혼서류 한 장만 남기고 진짜 집을 나가버렸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3월, 둘은 법적으로 이혼합니다. 1793~1794년 프랑스 혁명의 소용돌이가 한창이던 파리, 당대 최고의 화가이자 ‘미술계 황제’였던 자크 루이 다비드와 그의 아내 사이에서 벌어진 사건이었습니다.

도가 지나치다 싶지요. 다만 다비드가 던진 표가 보통 표는 아니었습니다. 혁명으로 물러난 왕 루이 16세의 사형 여부를 묻는 국회(국민공회) 투표였거든요. 루이 16세는 다비드를 아끼고 밀어주던 사람이었던 데다 인품도 괜찮았습니다. 하지만 다비드는 혁명의 대의를 위해 ‘사형 찬성’에 표를 던졌고, 루이 16세는 근소한 표 차이로 단두대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평소 루이 16세를 좋아하고 존경했던 아내의 입장에서 이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오늘 소개하는 다비드는 미술사에서 가장 정치적인 화가’로 꼽히는 인물입니다. 정치 때문에 이혼까지 할 정도니 말 다 했지요.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고, 나폴레옹이 등장하고, 프랑스가 전 유럽을 상대로 전쟁하고, 패배해 다시 왕이 돌아오고…. 다비드는 그 모든 사건의 한가운데 서서 자신이 본 것을 기록했습니다. 그는 왜 그런 삶을 살았을까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이번 주 ‘그때 그 사람들’에서 다비드의 삶과 작품, 그가 살았던 격동의 시대를 되돌아봅니다.
영웅을 동경했던 청년

다비드는 1748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습니다. 공교롭게도 이 해는 서양미술사에서 중요한 사건이 벌어진 때입니다. 화산 폭발로 묻혔던 로마 시대 도시 폼페이의 발굴이 이 해 시작됐거든요. 여기서 나온 로마의 아름다운 미술품들은 미술계에 큰 감동을 안겼고, 고대 그리스·로마의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신고전주의’를 낳습니다. 로마 유적 발굴 시작과 동시에 태어난 다비드가 훗날 신고전주의를 대표하는 화가가 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재미있습니다.

다비드는 어린 시절부터 유럽 최고의 화가를 꿈꿨습니다. 재능은 넘쳐났고 집안도 넉넉하니 충분히 해볼 만했습니다. 국립미술학교에 입학한 다비드는 금세 두각을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매년 열리는 최고 권위의 학생 대회, ‘로마상’에 다섯 번을 도전한 끝에 스물다섯의 나이로 최고상을 받았습니다. 당시 로마상 최고상을 받은 학생은 로마 유학비를 지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다비드가 유학 때문에 로마상에 도전했던 건 아닙니다. 그저 최고로 인정받고 싶었을 뿐이었지요. 로마로 떠나기 전엔 이런 얘기도 했다고 합니다. “로마 미술이 대단하다고들 하지만, 그래봤자 옛날 사람들이 남긴 거잖아요. 지금 화가들의 그림이 훨씬 더 좋을 수밖에 없지요. 로마에 가서 제가 감동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겁니다.” 하지만 막상 현지에서 실제로 본 로마 미술은 청년 다비드의 마음을 송두리째 뒤흔들어놨습니다. 얼마나 감동했는지 스승이 한마디 했다는 기록까지 있습니다. “야. 너무 감동하지 마.”

로마 미술품과 유적에 담긴 신들의 이야기. 신화 속 영웅 못지않은 능력과 위엄으로 대제국을 건설한 로마의 걸출한 인물들. 라파엘로와 카라바조를 비롯한 이탈리아 거장들의 걸작. 다비드는 이 모든 것에서 그림 테크닉과 영감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입니다. 그러면서 인류 역사를 움직이는 위대한 인물들, 즉 영웅에 대한 동경을 품게 됐을 겁니다.


5년간 로마에서 그림을 공부한 다비드는 ‘이제 내가 최고’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파리로 돌아와 미술계를 휩쓸기 시작합니다. 다비드가 작품을 발표할 때마다 평론가들은 “새로운 미술 사조(신고전주의)의 걸작” “아무리 봐도 결함이 없는 작품” 등의 극찬을 보냈지요. 특히 그가 루이 16세의 의뢰를 받아 발표한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는 최고의 명작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첫 번째 영웅 : 혁명의 로베스피에르


그러던 중 프랑스 혁명이 터졌습니다. 왕족과 귀족, 성직자 등 소수의 특권층에게 피를 빨리던 대다수 민중이 마침내 참지 못하고 들고 일어난 겁니다. 그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다비드는 자신이 찾던 빛나는 ‘영웅’을 발견했습니다. 급진적인 혁명 지도자, 로베스피에르였습니다.

다비드는 로베스피에르에게 접근해 곧 절친한 친구이자 정치적 동지가 됩니다. 그리고 프랑스 혁명을 촉발한 사건을 묘사한 ‘테니스 코트의 선서’ 등 혁명 분위기를 띄우는 걸작들을 그려 혁명 세력의 지지를 얻었습니다. 다른 핵심 인사들과도 친해졌는데, 기사의 가장 첫 부분에 나오는 그림이자 가장 유명한 그림인 ‘마라의 죽음’에 나오는 인물(마라)이 그중 하나입니다.


혁명 인사들과의 친분과 걸출한 그림 실력 덕분에 다비드는 핵심 정치인이자 미술계의 황제로 떠올랐습니다. 선전, 교육, 유니폼 디자인까지 ‘혁명’과 ‘미술’에 관한 일이라면 모두 그의 손을 거쳐야 했습니다. 자신을 아끼던 루이 16세가 처형당하고 이혼당하는 등 안타까운 일을 겪긴 했지만, 역사의 발전이라는 대의를 위해 어쩔 수 없는 희생이었습니다.

하지만 로베스피에르는 다비드가 꿈꾸던 영웅이 아니었습니다. 로베스피에르가 정의감 넘치는 청렴결백한 사람이긴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오직 자신만 옳다고 믿었고, 편협했으며, 현실을 잘 몰랐습니다. 혁명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죽였고, 잘못된 정책으로 서민들의 삶을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1794년 로베스피에르는 권력을 잃고 쫓겨납니다. 다비드도 두 번이나 감옥에 갇히지만, 제자들의 탄원으로 간신히 사면됩니다.
두 번째 영웅 : 나폴레옹 황제


다비드는 실망했습니다. ‘그래. 영웅 따윈 없는 거야. 내 나이도 이제 50이 다 됐어. 조용히 살아야지.’ 마침 마음을 제대로 잡게 하는 좋은 일도 있었습니다. 이혼했던 아내가 그를 용서하고 돌아온 겁니다. ‘사비니 여인의 중재’도 이때(1796년) 그리기 시작한 작품입니다. 혼란은 이제 지긋지긋하니, 그만 싸우자는 거지요.

그러던 1797년의 어느 날. 누군가가 다비드를 찾아옵니다. 파리 정계의 ‘슈퍼스타’로 떠오르고 있는 장군 나폴레옹이었습니다. “내가 이번에 이탈리아로 원정을 가는데, 학자들도 좀 데려가기로 했소. 당신이 왔으면 좋겠군.” 다비드는 이 요청을 거절했지만, 나폴레옹은 이듬해 다시 찾아와 “이번엔 이집트 원정을 간다. 따라오라”고 또다시 권했습니다.

이번에도 나폴레옹의 요청을 거절한 다비드. 하지만 그의 가슴은 다시 뛰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람이야말로 내가 찾던 영웅일지도 모른다.’ 그다음 해 나폴레옹이 쿠데타를 일으켜 사실상 프랑스의 최고 권력자가 됐을 때, 다비드가 그의 밑으로 들어가 나폴레옹의 위대함을 선전하는 대표 화가가 된 건 이런 이유에서였습니다.

혁명에 앞장섰다가 독재자 밑에서 최고의 화가가 된 그를 두고 ‘줏대 없는 변절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혁명 정부는 정의롭고, 나폴레옹의 독재는 나쁘다는 인식 때문일 겁니다. 하지만 당시 프랑스 사람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혁명 이후 수백 년간 이어진 사회 질서가 뒤집어지면서 프랑스 사회는 극심한 혼란을 겪었습니다. 곳곳에서 내전이 벌어졌고 서민들의 삶은 비참해졌습니다. 지친 프랑스 사람들은 ‘누가 좀 사회를 안정시켜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이런 기대를 나폴레옹은 완벽하게 충족시켰습니다. 그는 순식간에 국내의 혼란을 잠재우고 외국 강대국과의 전쟁에서 연전연승을 거뒀습니다. 1805년 합스부르크 왕가의 심장인 오스트리아 빈을 함락시키고, 이어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을 박살 낸 건 그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제 유럽의 지배자는 나폴레옹이었습니다.

철학 거장 헤겔은 그를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말 위에서 도시를 살펴보는 황제를, 그 절대정신을, 나는 보았다.” 그 위엄은 다비드가 1807년 완성한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정치 선전의 의도가 있긴 하지만, 진심으로 나폴레옹을 깊이 존경하는 게 아니라면 나올 수 없는 걸작입니다.



하지만 영원한 것은 없는 법. 완벽한 영웅인 줄 알았던 나폴레옹도 어느 순간부터 잘못된 길을 걸으며 갖가지 실책을 거듭하기 시작합니다. 그도 똑같은 인간이었던 겁니다. 나폴레옹 타도의 깃발 아래 유럽이 다시 뭉쳤고, 결국 나폴레옹은 1815년 처절하게 재기 불능의 상태로 몰락하고 맙니다.

그리고 프랑스는 다시 왕이 지배하는 나라가 됐습니다. 왕은 다비드가 사형에 찬성했던 루이 16세의 동생, 루이 18세였습니다. 1816년 다비드는 68세의 나이로 망명을 떠났습니다. 벨기에 브뤼셀이 목적지였습니다.
세 번째 영웅은 없다
나이 든 망명객 신세가 됐지만 다비드는 유럽 미술계의 최고 거장이었습니다. 벨기에 왕은 그를 반기며 극진히 대우했습니다. ‘러브콜’도 쏟아졌습니다. 프로이센(지금의 독일) 왕은 “예술부 장관이 돼달라”고 했습니다. 가장 놀라웠던 건 루이 18세가 보낸 편지였습니다. “사면해줄 테니 궁정 화가로 돌아와 주시오.” 그만큼 그의 실력이 탐났던 거지요.

하지만 다비드는 이를 모두 단칼에 거절했습니다. 그 대신 한때 정치 때문에 이혼했던 아내와 평화로운 노년을 보냈습니다. 작품 활동과 제자 양성에 매진하며 전 유럽 예술가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고요. 이런 생활은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이 시기 그의 작품에서 주목할 만한 건 화풍의 변화입니다. 평생 영웅들의 강렬한 모습을 즐겨 그렸던 다비드. 하지만 말년의 그는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작품들을 많이 남겼습니다. 특히 자주 등장하는 건, 강력하고 단단해 보이는 영웅들이 약하다고 여겨졌던 부드러운 존재들에 의해 무장 해제되는 모습입니다.


파란만장했던 삶을 되돌아본 다비드. 그는 작품을 통해 이런 깨달음을 전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요.

살아 보니 영웅은 없었다고. 사람 좋고 착했지만 민중을 착취하던 루이 16세도, 정의를 외치며 들고 일어났지만 사람들을 마구 죽이고 서민들의 삶을 어렵게 했던 로베스피에르도, 인간을 초월한 카리스마와 능력을 보여줬지만 수많은 사람을 학살하고 결국 몰락한 나폴레옹도 영웅이 아니었다고. 살아 보니 영웅처럼 보이는 강력한 정치인들보다 훨씬 위대하고 영웅적인 존재는,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며 서로 사랑하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고.

오늘 준비한 이야기는 여기에서 마치려 합니다. 이번 주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i>*(참고문헌) 이번 기사의 내용은 </i>‘<i>자크 루이 다비드</i>’<i>(재원), </i>‘<i>자크-루이 다비드의 회화와 ‘위대한 인물’의 관념- 정치적 텍스트로서 예술</i>’(<i>하상복), </i>‘<i>Jacques Louis David: Radical Draftsman</i>’<i>(Perrin Stein 등 지음), </i>‘<i>David</i>’<i>(Simon Lee 지음),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등 다비드 작품의 소장처 홈페이지 정보 등을 참조했습니다. 기사 마지막 부분의 작품 해석은 미술사학자 Satish Padiyar와 Lebensztejn, Jean-Claude의 주장에서 모티브를 얻었습니다.</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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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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